불경/반야심경해설

[스크랩] 반야심경(1)

꽁지머리조 2009. 7. 17. 23:17

반야심경(1)




1장 서론

1. <반야심경>의 위치

대승불교운동.

부처님의 가르침에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구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흔히 불교의 사상을 크게 소승과 대승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소승이란 범어로 히나야나라고 하는데, '작은 수레'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소승이란 의미가 그렇듯이 소승불교는 출가인의 개인적인 수행만을 제일주의로 여겼습니다.
소승과는 대조적으로 대승이란 범어로 마하야나라고 하는데, '큰 수레'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긍극 목표는 부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는 근본 뜻을 좇아 자기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자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리와 이타라는 보살행의 실천을 통해서 다함께 성불하자는 데에 최고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존 당시부터 입멸 후 백년까지르 흔히 원시불교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후 부파불교 시대를 맞이했는데, 그것은 계율의 해석 차이로 인해 갈라진 불교시대를 말합니다. 대승불교 운동은 부처님의 입멸 후 오백년 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원시불교와 부파불교 시대를 거치면서 일어나 대승불교 운동은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대승불교 운동은 한 마디로 부처님의 근본 사살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진정한 뜻을 찾는 데 있어서 단지 이론이나 관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의 실천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표방하는 대승불교 운동은 곧 공사상(空思想), 반야사상(般若思想), 연기설(緣起說), 중도사상(中道思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열반사상(涅槃思想), 보살상상(菩薩思想) 등을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공사상은 <반야심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공통적으로 깔려 있는 중요한 핵심 사상입니다. 공사상은 존재의 원리를 파헤친 것으로 반야사상과 연기설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반야사상은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을 설한 공사상을 실천적인 면에서 완성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반야는 공의 이치를 완전히 체득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연기설은 우주와 인생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 법칙입니다. 생사윤회의 순환고리인 십이연기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깨달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연기법은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우주와 인생에 대해 철저히 파헤침으로써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이론입니다.
대승불교의 사상 중에서 공사상, 반야사상, 연기설은 앞으로 공부하게 될 <반야심경>의 근간이 되는 중심 내용이므로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오시교(五時敎), 삼종(三宗), 삼관(三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사십구년 동안 각처를 다니시면서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설해졌기 때문에 그 양과 내용은 참으로 방대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남겨진 말씀들은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전문적인 학자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재정립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사십구년 간 설하신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섯 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오시교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화엄시(華嚴時)로, 성도 후 최초의 삼칠일간 <화엄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 깨달음 전체를 설하셨지만 일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쉬운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는 아함시(阿含時)로, 그 다음의 십이년 간 <아함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객관적인 물질계에 대한 가변성과 욕망의 절제 등에 대해서 설하셨습니다.
셋째는 방등시(方等時)로, 그 다음의 팔년 간 <유마경>.<금광명경>.<능가경>.<승만경>.<무량수경> 등 방등부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연기의 법칙과 주관에 대한 부정을 언급하셨습니다.
넷째는 반야시로, 그 다음의 이십일년 동안 <반야부>의 여러 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부정의 부정을 통하여 공의 세계를 밝히셨습니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은 무려 육백여 부에 해당되며, 그 중에서 <반야심경>은 반야의 골수만을 간추린 경전에 속합니다. 반야시는 설법 기간도 가장 길며 반야부의 경전들을 통하여 깨달음의 정수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반야부 경전은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교리적인 면에서도 가장 중심에 들어 있습니다. 반야부 경전은 소승불교에서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여 반야사상을 바탕으로 대승불교를 꽃피운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야부 경전의 중심 내용인 공사상, 반야사상은 대승불교의 밑바탕이 되기 때무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섯째는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 최후의 팔년 간 <법화경>과<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는 부정의 부정을 거쳐서 대긍정의 세계를 설하셨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분류를 내용면으로 볼 때 아함시는 소승경전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대승경전에 속합니다. 또 아함, 방등, 반야, 법화열반의 네 가지는 하나의 화엄으로 종합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시교와 연관지워 불교경전을 내용적인 면에서 다시 삼종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처음에는 자신이 깨달으신 전체 내용을 화엄사상으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너무 높아 아무도 알아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한 법락(法樂)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주 낮은 단계로 끌어내려 차츰 높은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세 가지 단계로 설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경전들은 이 세 가지 삼종의 범주 안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모든 현상계를 '있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는 상(相)과 유(有)이 차원입니다. 이것은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괴로움도 있고, 괴로움의 원인도 있고, 괴로움의 소멸도 있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있는 괴로움과 그 괴로움에 대한 원인과 해결 방법이 있다는 입장에서 사성제와 팔정도가 설해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십년 간을 주로 모든 현상계가 있다고 하는 유와 상의 상식에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아함경>은 주로 유의 입장에서 설해진 경전에 속합니다. 유의 차원은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는 세계로, 많은 부분이 방편설(方便說)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 하는 유의 사상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도 잘 통하는 세계입니다. 또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그러나 유의 상식으로 풀어지지 않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설해진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현상계를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는 공과 무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모든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여기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공의 사상을 낳게 했습니다. 모든 현상계는 텅 빈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상을 공한 것으로 보는 지혜의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십일년 간을 주로 공의 입장에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반야부의 많은 경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하며, 앞으로 공부하게 될 <반야심경>은 바로 공이나 부의 입장에서 설해진 대표적인 경전에 속합니다.
셋째는, 모든 현상계를 존재하는 그 자체로 '진리'라고 보는 성(性)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진성(眞性).법성(法性).진여(眞如)의 차원입니다. 성의 차원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대로 진리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가장 차원이 높은 견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팔년 간을 성의 입장에서 현상계를 설하셨습니다.
성의 차원에서 설해진 경전으로는 <화엄경>.<법화경>.<능엄경>.<열반경> 등이 있습니다.
성의 차원은 또 '비유비무 역유역무(非有非無 亦有亦無)'라고 표현됩니다. 그것은 곧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의 입장은 우리가 흔히 잘 쓰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과도 잘 통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므로 그대로 진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경전의 모든 말씀, 즉 팔만대장경은 상.공.성의 삼종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법문이든지 이 세 가지의 열쇠로 풀리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선사의 법문을 빌려 삼종을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상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가 됩니다.
그러나 공의 입장에서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성의 입장에서는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사홍서원에 나오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를 상.공.성의 각기 다른 안목에서 살펴 볼 수도 있습니다.
상의 입장에서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공의 입장에서는 우주 만물이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에 중생 또한 공한 것으로 보아 공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견해입니다.
성의 입장에서는 중생이 곧 부처이므로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견해입니다.
삼종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있는 그대로가 전부인 양 착각하여 사는 것은 상이나 유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공한 것인 줄 알면서 살아가는 것은 공이나 무의 입장입니다. 공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상의 입장에서는 사는 일 그 자체에만 매달려 살지만 공한 입장에서는 인생의 공한 일면을 들여다보면서 살아가는 지혜의 안목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차원이 높은 성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인생을 진리 그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고 크게 뭉뚱그려 보면 위의 상.공.성 세 가지 견해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를 볼 때 한 가지 견해로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바라볼 줄 아는 지혜의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공.성 삼종과 함께 우리의 안목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삼관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공관(空觀)입니다.
모든 현상을 공하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공관은 결국 공의 입장에서 현상계를 관찰하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라만상의 실체는 본래 공한 것이며, 인연에 따라 잠깐 생긴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공관은 삼종에서 무와 공의 입장에서 현상계를 이해하는 차원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가관(假觀)입니다.
모든 현상계는 본래 공한 것인데 거짓 모습에 속아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가관은 앞의 삼종 중 유와 상의 입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관은 모든 현상을 가상의 입장에 집착해서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셋째는 중도관(中道觀)입니다.
중도관은 현상계를 그대로 진리의 차원에서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중도관은 가장 이상적이고 차원 높은 입장으로, 삼종 중 성의 견해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오시교와 삼종, 삼관을 통하여 <반야심경>의 경전 상 위치와 내용적인 면을 대강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의 중심이며, 동시에 불경의 심장부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팔만대장경 전체의 정수는 반야부의 경전이며, 그 반야부의 정수가 바로 <반야심경>인 것입니다.

2. <반야심경>의 사상

공이란?

앞에서 삼종, 삼관을 통하여 살펴볼 때 <반야심경>의 주된 내용은 공사상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이란 범어로 수냐(Sunya)라고 하는데, 그 뜻은 '텅 비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공의 본래 의미는 일체법(一切法)은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거기에 아체(我體), 본체(本體), 실체(實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제법개공(諸法皆空),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 현상계를 공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을 공관이라고 하여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공은 허무가 아닙니다. 공을 관찰하는 것은 그대로 진리에 대한 발견입니다. 그래서 진공(眞空)은 그대로가 묘유(妙有)라고 해서 진공묘유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즉, 진정한 공은 묘하게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공에 대한 가르침은 불교경전 전반에 거쳐 설해진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특히 대승불교의 반야부 경전에서 그 이론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공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크게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 있으며, 많게는 이십공(二十空)까지 있습니다. 여기서 그 종류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한 마디로 공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존재의 실상을 철저히 규명짓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사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실상이 텅 빈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실상대로 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끝없는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괴로움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 위해서는 공관으로 현상계를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분명히 있는 것인데 왜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선 모든 것을 공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실체이든 하나로 고정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현상계의 모든 것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떤 고정불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 입장은 무엇이든지 되고자 한다면 그 의지대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의 컵이 있다고 할 때 일차적으로 그것은 물을 마시는 도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컵이 그 하나의 기능으로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컵으로 상대방을 향해 던져서 상처를 냈을 때는 흉기로도 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컵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실체가 공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공이라고 해서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진정하게 공한 것은 묘하게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허무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공의 차원은 본래 공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공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한 가지 고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 중국 변방에 어느 노인이 외동 아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말타기를 좋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말타기를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은 그만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위로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을 나갔던 말이 다른 말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들 좋아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없이 덤덤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외아들은 말이 두 필이나 되어 더욱 신이 나서 말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이 말에서 저 말로 뛰어오르며 말타기를 게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외아들은 그만 잘못하여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또다시 동네 사람들은 노인을 위로하며 다리 병신이 된 아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나라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을의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리 병신이 된 그 아들은 전쟁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마을의 청년들은 모두 죽었지만 다리 병신이 된 그 아들은 살아남아 아버지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말합니다. 흔히 무슨 일의 결과에 따라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표현을 잘 씁니다. 이것은 곧 좋은 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나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근본이 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현상계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옹지마의 고사에서 살펴보면 말을 살 수도 있고, 그 말이 도망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그 말이 다른 말을 데리고 올 수도 있고, 말을 타다가 다리 병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근본이 공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집과 집착은 세상은 늘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공의 차원에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있는 것으로 깊이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거짓 껍데기에 집착하여 생기는 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감정으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는 우리에게 큰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반야심경>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임을 거듭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라고 하는 실체는 텅 빈 것이므로 그 텅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자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통하는 말입니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자기 자신의 실체는 본래 백지와 같습니다.
그 백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령 백지 위에 성자의 모습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그림을 한 순간에 먹칠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한 사람도 무식해질 수 있고, 무식한 사람도 유식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고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으로 생각하면 괴로울 게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좋은 방향으로 전화위복이 되어 또 다른 삶이 전개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 한순간 가능성은 무한한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의 좁은 안목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물질에 대해 텅 빈 것으로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신작용에 대해 공의 입장으로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감정들을 텅 빈 것으로 볼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예을 들어 부모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누구나 슬퍼할 것입니다. 온 우주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슬픈 감정 속에는 얼마든지 다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슬픔의 감정에 휩싸여 있어도 주위의 돌아가는 온갖 것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 속에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남을 미워하는 온갖 감정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질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넓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미움이나 슬픔 등의 감정 속에도 그 안은 텅 비어서 얼마든지 다른 감정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실체가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움의 감정, 슬픔의 감정이 일어나면 온통 그런 감정 뿐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착각이며 환영입니다. 환영이나 착각과 같은 그릇돤 인식작용에 끄달려서 온갖 문제에 휩사이게 되는 것입니다.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두운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물체가 발부리에 걸렸습니다. 그는 그것이 뱀인 줄 알고 정신없이 도망쳐습니다. 다음 날 다시 그 자리에 가 보니 그것은 한낱 새끼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온통 상처로 얼룩지는 것입니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모든 것의 분별이 가능합니다. 영원할 것 같은 감정들도 알고 보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숱한 감정들은 뿌연 안개처럼 잠시 우리 앞을 가로 막아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 실상은 텅 빈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잘못 볼 것인지, 아니면 밝은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환히 분별할 것인지는 바로 공의 지혜를 터득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개되는 온갖 문제들, 또는 온갖 좋지 못한 감정들은 우리를 괴로움의 덫으로 옭아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문제를 낳아 눈덩이처럼 자꾸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방법은 근본이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보다 낳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에 대한 지혜의 안목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공이기 때문에 인연에 의해서 무엇이든 가능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이 되는 공사상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아무 걸림없이 꿈과 희망과 포부와 기대를 갖고 살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공과 반야

앞에서 공이란 일체의 현상계가 존재하는 영원 불변한 법칙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 법칙으로서의 공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 그 자체가 곧 반야입니다.

반야는 범어로 프라야나(Prajna)라고 하는데 '혜(慧).지혜(智慧).명(明)' 등의 뜻이 있습니다. 즉, 반야는 모든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합니다.

반야의 지혜를 통해야만 성불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며, 어머니인 것입니다. 또한 반야는 제법(諸法)의 여실한 이치를 밝힐 뿐만 아니라 중생을 교화하는 실천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야의 지혜는 단순한 세속적인 지혜가 아닙니다.
인생과 우주의 참 모습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일 그 자체가 바로 반야의 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성(空性)의 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최상의 완전한 지혜가 바로 반야입니다.

그래서 공과 반야는 하나로 연결되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 이해가 곧 반야이며, 반야는 곧 공의 실상을 깨닫는 일인 것입니다. 반야는 일체의 사물이나 도리를 궁극점까지 추적해서 그것의 영원한 진실을 파악하는 일 자체를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부터 반야의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탐.진.치 삼독과 번뇌로 뒤덮여 반야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번뇌를 제거하는 일이 곧 반야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결국 번뇌와 반야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뇌와 반야의 실상은 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중심 사상은 공이며, 반야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의 궁극 목표이기도 합니다. 반야의 완성, 곧 지혜의 완성을 향한 부단한 노력없이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은 이 현상계에 너무도 매혹되어 진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을 깨우가 위한 반야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되 현실에 푹 빠져서 캄캄하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지혜의 밝은 눈으로 인생을 관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반야심경>의 교훈입니다.

지헤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관조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지혜에서 온다는 것을 <반야심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흔히 인간 행위의 진정한 귀결점은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있다고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 당면한 어떤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낙(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 그 자체는 고에 해당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에 대한 것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을 현대적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문제로 대처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한 낙의 상태가 되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안함은 완전 무결한 상태의 평화를 말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지극히 편안한 극락(極樂)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곧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실천,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반야의 지혜는 밝아 태양과 같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길을 가다가 무엇에 부딪히면 그저 막연하게 돌이거나 나무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한낱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런 막연하게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반야의 지혜는 밝은 태양과 같은 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돌인지, 나무인지, 짐승인지, 사람인지를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용담 스님과 덕산 스님이 있었습니다. 용담 스님은 남방의 선 수행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반면에 덕산 스님은 <금강경>을 평생 연구하는 학자로서 그 분야에서는 일인자였습니다.

덕산 스님은 용담 스님의 명성을 꺾으려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이 평생 연구한 업적이 담긴 서적을 짊어지고 가서 용담 스님을 만났습니다. 덕산 스님은 밤이 이슥해지도록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덕산 스님은 그만 잠자리에 들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칠흙같이 어두워 신발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덕산 스님은 신발을 찾기 위해 용담 스님께 촛불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용담 스님은 촛불을 건네 주고는 덕산 스님이 신발을 찾으려 할 때 그만 촛불을 확 꺼 버렸습니다. 갑자기 천지가 암흑처럼 어두워졌습니다. 그 순간 덕산 스님은 깨달음의 밝은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날 덕산 스님은 자신이 평생을 연구한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지식의 안목은 한낱 허공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알음알이로서의 지식과 반야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과 지혜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막연하게 돌이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과 밝은 태양 아래서 확연히 구별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결국 <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은 공의 이치를 관조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그 지혜로써 문제를 해결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상계를 공의 원리에 입각해서 관찰할 때 반야의 지혜는 저절로 생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과 연기(緣起)

공사상과 관련지워 연기설은 불교의 중심사상으로 모든 현상계의 이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연기법에 의해 모든 현상들은 생성,변화, 발전, 소멸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빼고는 불교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연기설은 중요한 교리입니다.

연기는 범어로 프라티탸샤무파다(Pratitya - Samutpada)라고 합니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줄여서 말한 것으로, 무수한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생기는 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여러 자기 조건, 곧 인연에 위해서 잠정적으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일체법은 조건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존재성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실상을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이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이 가능합니다. 결국 공사상과 연기의 법칙은 불가분의 관게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연기의 공식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因此有彼 無此無彼 此生彼滅 此滅彼滅-중아함권47)'입니다.

이 말씀은 연기의 법칙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모든 현상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상호 관계를 가짐으로써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현상도 독립적이며 자존적인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조건이나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일체개공(一切皆空)도 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상호의존 관계에 의해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현상은 개별적으로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물체는 연기에 의해 존재하며 자성이 없는데, 그것은 곧 공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현상게는 본질적으로 텅 비어 있고,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연기의 법칙 때문입니다. 연기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연은 자꾸 변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법칙은 인연에 의해 잠깐 있는 것이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공사상도 텅 비어서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질은 텅 빈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보면 공인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 비추어 볼 때, 살아 있으나 확실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인연이 다했을 때는 사라져 없어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생성,변화, 발전, 소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離滅)'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성주괴공이란 물질이 구성되어 없어지는 기간을 사기(四期)로 나눈 것입니다. 물질이 처음에 생겨서 얼마 동안 존재하다가 점차 파괴되어 끝내 없어져 공무(空無)한 것을 성주괴공이라고 말합니다.

또 생주이멸은 주로 정신적인 측면의 변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서 머물렀다가 변화하여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의 법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존재이든 모든 것은 성주괴공, 생주이멸의 과정을 거칩니다. 고정불변한 존재는 없습니다.
모든 현상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온갖 복잡한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옷깃을 한 번 스쳐도 오백년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의 물질이나 현상이 생기기까지는 엄청난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가 생기는 것도 많고 많은 인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믿는데서 시작합니다. 그런 생각은 거의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인 것으로 굳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것이든 인연에 의해 생기면 반드시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기로서 존재한다는 법칙을 원리대로, 또 사실대로 이해한다면 설사 문제가 일어나도 그것은 괴로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어른이 늙어가는 것은 슬퍼하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것은 대견해 합니다. 이치적으로 따진다면 어린 아이가 자라는 것도 슬퍼해야 합니다. 존재의 법칙에 입각하면 이 두 가지는 같은 맥락에서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에 맞는 일만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 하거나 부정하는 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은 결코 둘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현상계의 모습은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연기의 관계 또한 두 가지 원리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공이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면 생기게 되고 인연이 사라지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법의 근간에는 공사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으로 공사상, 공과 반야, 공과 연기의 관계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경문의 해설을 통해 그 내용을 보다 명확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반야심경>의 구조

사분(四分)구조

<반야심경>의 구조는 마치 짜임새 있게 잘 짜여진 건축물과 같습니다. 경의 제목까지 모두 합쳐 이백칠십 자 밖에 안되는 짧은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깊은 뜻을 암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의 구조는 대체로 네 가지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반야의 주된 뜻을 세우는 부분입니다.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이치로 살펴보니 일체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을 밝히고, 그래서 일체의 괴로움을 해탈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경문의 처음인 "관자재보살"에서 "도일체고액"까지 입니다.

둘째, 그릇된 인식을 깨뜨리고 반야의 공관으로 비춰보는 부분입니다. 모든 현상과 가치와 방편을 지혜의 공도리(空道理)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 현상은 공이며, 공이 또한 일체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은 일체에 가득차 있어서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제법(四諦法)까지 텅 비어 공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한 도리는 아무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문의 "사리자 색불이공"에서 "무지역무득"까지 입니다.

셋째, 지혜의 공관으로 일체 현상을 비춰본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을 설한 부분입니다. 일체의 현상은 지혜의 눈으로 보면 공한 것임은 앞에서 모두 설명했습니다.

이 부분은 거기서 나타나는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이 자유로우며 마침내 열반에 이르러 성불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경문의 "이무소득고"에서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입니다.

넷째, 전체 경의 결론 부분입니다.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이치는 그대로 진리의 참 모습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무한한 공덕을 나타내는 큰 위신력을 가지고 있음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에서는 반야의 공관이야말로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극찬구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경문의 끝부분인 "고지 반야바라밀다"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주문까지가 결론에 해당됩니다.

이상의 사분구조는 <반약심경>을 기승전결의 형식에 맞추어 분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설(顯說)과 밀설(密說)

앞에서 살펴본 네 가지 분류법 외에 또 다른 방법으로 <반야심경>의 구조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현설과 밀설의 두 가지 형태로 나누는 것입니다.

경의 제목은 그대로 두고 경문의 내용을 크게 현설과 밀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현설은 내용을 그대로 드러내서 나타낸 부분을 말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밀설은 주문으로 되어 있어서 그 내용을 숨겨서 비밀스럽게 전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그래서 현설은 맨 처음의 "관자재보살"에서 끝부분의 "즉설주왈"까지가 이 부분에 해당됩니다.

밀설은 맨 마지막 구절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주문이 이 부분에 해당됩니다.

현설은 다시 총설(總說)과 별설(別說)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총설은 경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뜻을 밝힌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총설에서는 전체적인 요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별설은 총설의 큰 뜻을 낱낱이 분별해서 나타낸 부분을 말합니다. 즉, 별설에서는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조목조목 이치를 따지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설부분은 맨 처음의 "관자재보살"에서부터 "도일체고액"까지를 말합니다.

별설부분은 "사리자"에서부터 끝 부분의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까지를 말합니다.

총설에서 이미 그 주제를 다 드러내 놓고 별설에서는 구체적인 항목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총설에서 관자재보살로 하여금 반야를 이루게 하고, 별설에서는 사리자를 내세워 반야에 대해 하나 하나 분별해서 공의 이치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반야심경>의 구조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 보았습니다.
사분구조와 현설과 밀설의 이분 구조는 서로 공통된 부분이 있슴을 알 수 있습니다.

사분구조의 첫부분은 현설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눈 총설부분에 해당됩니다. 이 대목에서 <반야심경>의 모든 것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설부분은 <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을 드러낸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경의 제목과 함께 경문의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반야의 주된 뜻

1. 지혜는 참으로 위대한 것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옮김>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

<풀이>
지혜의 완성 - 삶의 완성, 성공적인 인생이란 모든 고난과 불행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진정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그 길은 오로지 위대한 지혜로써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로써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보람과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해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입니다. <천수경>.<예불문> 등과 함께 의식을 행할 때 반드시 독송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불자들은 잘 외우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이 비록 짧은 경전에 속한다고 해도 내용면으로 볼 때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두고 공부하지만 그 이치를 제대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경전에 속합니다.

팔만대장경 안에는 일곱 종류의 <반야심경> 번역본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것이 중국 현장(玄獎) 법사의 번역본입니다. 여기에 강술하는 <반야심경> 또한 현장 법사의 번역본입니다.

<반야심경>의 일곱 가지 번역 중에는 간단히 해 놓은 것과 체계적으로 된 번역이 있습니다. 간단한 번역을 약본(略本)이라 하고, 구체적으로 된 번역을 광본(廣本)이라고 말합니다.

광본에는 서론, 본론, 결론이 다 갖추어져 있으나 약본에는 서론과 결론은 모두 생략되고 본론 부분만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는 약본 <반야심경>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경의 제목은 상당히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경전의 제목에는 그 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원래 제목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인데 그것을 줄여서 <반야심경>, 혹은 그냥 <심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맨 앞의 "마하"는 원래 없었던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붙여진 것입니다.

맨 앞의 "마하"는 범어로 마하(Maha)라고 하는데 그것은 '크다(大), 수승하다(勝), 많다(多)'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하"는 우리가 단순히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하"의 크기는 어떤 한계나 제한이 없는 무한대의 크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하의 크기 속에는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마하"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절대적인 크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번역해서 쓰지 않고 그냥 "마하"라는 말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반야"라는 말은 앞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인도말로 프라야나라고 합니다. 그 뜻은 '지혜, 명, 혜'등이 있습니다. 흔히 "반야"를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야"는 법의 실다운 이치를 깨달은 최상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래서 "반야"를 얻은 사람은 성불하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야"는 한 마디로 깨달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반야"는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의 지혜는 우리의 참 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잠자는 동안에도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죽음이 눈 앞에 닥쳐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애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고 나면 자기 자신은 따뜻한 이불 속에 편안히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서 몸부림쳤던 것은 현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불 속에 편안히 누워 있는 모습이 현실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헤는 꿈 속에서 살기 위해서 꾀를 부리고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은 자신의 실상이 아닙니다. 꿈을 깬 모습이 바로 자신의 참 모습임을 깨닫는 일,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반야" 곧 지혜입니다. 우리는 꿈 속의 것이 현실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문제 해결이 "반야" 속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 사회 문제, 정치 문제, 노사 문제 등 그 어떤 문제라도 "반야"의 지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반야"를 얻기만 하면 그것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습니다. 또 "반야"는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반야"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 되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서 "반야"의 지혜가 구체화 될 수 있으며,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반야"를 통해 삼세제불은 정각(正覺)을 이루고, 보살은 열반을 얻고, 중생은 당면한 문제와 나아가서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지혜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라밀다"는 "반야"와 함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범어로는 파라미타(Paramita)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다"는 도피안이니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란 바로 지혜의 열쇠로서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도피안이라고 해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안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적 경지인 깨달음의 세계를 피안이라고 하는 반면에 미혹의 중생 세계는 차안(此岸)이라고 합니다. 차안은 곧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피안, 곧 "바라밀다"는 결국 꿈을 깨고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편안함과 안락함이 항상 깃든 곳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꿈꾸는 극락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경"은 '핵심되는 경전'이란 뜻입니다. 범어로 흐릿다야 수트라(Hrdaya - Sutra)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음의 경'.'진수(眞髓)의 경'.'심장의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심경"이라고 해서 단순히 마음의 경전이란 뜻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마음의 경전이 까닭에 <반야심경>에서 굳이 마음의 경전이라고 해석할 필요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경"이란 반야부의 가장 중심되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체 반야부의 경전 중에서 심장과 같이 핵심적인 진수만을 요약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전체 제목이 담고 있는 뜻은 곧 '큰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밝힌 중심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흔히 '지혜의 완성'이란 말로 압축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 가장 중심되는 말은 역시 "반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반야"를 얻음으로써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열반을 얻고, 정각을 이루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열쇠가 곧 "반야"이며, 그 열쇠로써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바로 "바라밀다"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큰 지혜로써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되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야심경>은 공의 도리를 밝히고 지혜로써 깨달음을 이루는 이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2. 몸과 마음은 텅 빈 것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옮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 보고 일체 고액을 건넜다.

<풀이>
우리들이 선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자, 관세음보살은 지혜의 완성자다. 그 지혜를 통하여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모든 현상계와 온갖 감정의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깨달아 안다. 몸도 마음도 텅 비었기에 일체 고난과 불행과 문제들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이니, 불행이나, 문제니 하는 것은 결국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내 몸을 중심하여 나라는 것, 나의 것이라는 것 등 많고 많은 감정들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반야의 삶을 통하여 모든 고난과 문제를 해결하였다.

<해설>
여기서부터 경문의 시작입니다.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에 비해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구절이 맨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경전 성립의 배경 설명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야"의 진수를 뽑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독송되고 있는 <반야심경>의 본문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범서로 된 <반야심경>에는 경의 맨 처음에 '일체지자(一切智者)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체지자'란 바로 지혜를 완성한 분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을 가르친 경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지자에게 귀의한다'는 구절은 <반야심경>이 지혜의 경전임을 잘 나타내주는 귀중한 말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관자재"는 범어의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아바로키타의 '관(觀)'과 이스바라의 '자재(自在)'를 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에 있어서 자유자재한 분'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지혜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분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운 마음을 그 직관지(直觀智)로 투시하는 보살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가 인격화된 분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것을 두루 살피고, 알고, 듣기 때문에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주는 분입니다.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부를 때만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라 부르지 않아도 항상 어머니의 관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자입니다. 반야의 힘으로 우주와 인간의 근본 실상을 확연히 보는 것입니다. 반야의 실천 내용은 곧 자비행입니다. 자비를 통한 반야의 실천을 완성하는 자로서 "관자재보살"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은 궁극적으로 진리를 실현하고 반야의 완성을 통해 피안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관자재보살'에서 보살의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입니다. 보리살타는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것으로 불교의 이상적인 구도자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가진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분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넓은 의미로 볼 때 보살은 올바른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며 꿈꾸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살이란 보다 낳은 인생을 위해 꿈과 희망과 포부를 갖고 향상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잠깐 "관자재보살"의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말하는데,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재물을 주는 행위를 재보시(財布施)라 하며, 진리를 일러주는 행위를 법보시(法布施)라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행위를 무외시(無畏施)라 합니다.

둘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곧 행도을 절제할 줄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진리의 길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은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안정시키며, 사념(思念)의 근원을 투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입니다.

여섯째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앞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최고의 지혜를 획득하는 일입니다. 또 최고의 지헤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을 말합니다.

이상의 여섯 가지는 보살이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바라밀은 생각만 갖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그것을 닦는 자만이 그 진가를 알고 성불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행한다'는 것은 반야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말합니다. "심반야"는 깊은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공의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밀다"는 경의 제목에서 살펴 보았듯이 도피안, 즉 '저 언덕을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도리를 실천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깊은 지혜로써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관자재보살"은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중생의 삶처럼 고뇌와 문제가 가득한 삶이 아닙니다. 지혜로써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인생이며, 저 언덕에 건너간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깊은 지혜로써 저 언덕을 건너가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이어지는 "조견오온개공"에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본다'는 뜻입니다. "조견"의 뜻을 좀 더 선명히 번역하면 '밝히 본다' 또는 '저 먼곳으로부터 내려다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은 범어로 판챠 스칸다(Panca Skadha)인데 그 뜻은 '다섯 가지 쌓임'이란 말입니다. "온"은 화합하여 모인 것을 뜻합니다. '오온"은 곧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으로는 색온(色蘊).수온(受蘊).상온(想蘊).행온(行蘊).식온(識蘊)의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색온은 스스로 변화하고 다른 것을 장애하는 물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위시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색온에 해당됩니다.
색온의 본래 의미는 '무너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질의 특성은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 것이며, 인간의 육신 또한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온은 고(苦)와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수온은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 달다 쓰다 등의 감각을 느끼는 일차적인 마음의 감수작용인 것입니다.

상온은 외부로부터의 사물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상상해보는 마음의 요소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는 등의 마음작용을 상온이라 합니다. 상온은 일종의 지각(知覺) 작용을 말합니다.
느낌이나 감각의 인상을 머리 속에서 정리하는 표상(表象) 작용을 일컫는 것입니다.

행온은 인연으로 생겨나서 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앞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작용이 계속 이어지는 상태를 행온이라 합니다. 행온은 분별한 감정을 생각으로 굴려서 마음의 행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의지와 행동 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충동력을 행온이라 합니다.

식온은 의식하고 분별해서 아는 마음의 인식작용을 말합니다. 또한 식온은 모든 인식의 주체가 되는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을 한꺼번에 일컫는 것이 식온입니다.

"오온"의 다섯 가지 중에서 수.상.행.식의 네 가지 정신작용은 아주 미묘해서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오온"에서 색온은 인간의 육신에 해당되는 부분이고, 나머지 수온.상온.행온.식온은 인간의 정식적인 면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육체보다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세분되어 나누는 것입니다.

"오온"을 쉽게 풀이하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 작용 때문에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오온" 중에서 수.상.행.식의 작용은 복잡하고 연쇄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먼저 좋다, 나쁘다의 수온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 상상의 끝에 가면 물건을 사게 되는데, 그것은 행온작용입니다. 이어서 식온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 물건에 대해 관찰하고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등의 구상작용을 말합니다.

게속해서 "개공"은 '텅 비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도 잠깐 살펴 보았지만 여기서 "공"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자세히 부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변성(不變性)과 가변성(可變性)입니다. 불변성은 그대로 진(眞)의 차원이고, 가변성은 여(如)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꿈을 꾼다고 했을 때, 꿈을 깨고 나면 꿈 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온데 간데 없고 그대로 이불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있는 상태는 진의 차원입니다. 반대로 꿈 속에서 꿈을 꾸는 동안 온갖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여의 차원입니다.

본문의 "오온개공"도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오온" 그 자체가 그대로 "공"이며 진이라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은 영원불변한 것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온'은 가변적이어서 환영적(幻影的)이며 비실재적(非實在的)인 것이라는 차원입니다. 이것은 여의 입장입니다.
대부분 "오온개공"을 가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에 대한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에 "공"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공"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이 바로 "공"입니다.

"조견오온개공" 즉,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현상적으로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를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꼭두각시 인형 놀음을 보고 있으면 온갖 희노애락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장막을 걷어 버리면 인형들의 희노애락은 한낱 손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모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그대로 텅 빈 것인데도 불구하고 집착과 아집에 가려 인형들의 놀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고 한다면 괴로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게 될 때 문제는 이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존재의 실체를 텅 빈 것으로 바로 아는 일이 곧 반야입니다. 근본이 텅 빈 것이라고 해서 허무하거나 무상한 것이 아닙니다. 텅 비었다는 것은 무한히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비었을 뿐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감정이 그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이 영원한 것인 양 착각하여 탐.진.치 삼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입니다.

흔히 자존심을 건드려서 감정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존심이 마치 자기 자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습관화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독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그 안에 들어갈 틈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아집으로 꽉 막혀 있을 때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가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는 지헤가 필요합니다. 존재의 법칙은 텅 빈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텅 빈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접시가 있다고 할 때 겉모양으로 보면 빈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접시의 구성을 물리학적으로 관찰하면 분자와 분자가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자와 분자 사이의 공간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거리입니다.

분자와 분자 사이의 거리를 쉽게 이해하자면 그것은 지구와 태양의 거리보다 훨씬 더 길고 넓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분자와 분자의 인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분자와 분자 사이의 인력 때문에 마치 접시가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물을 들 수 있습니다. 물이야말로 아무런 공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출렁거립니다. 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꽉 차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는 다른 것이 들어갈 공간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마시는 청량음료는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에 탄소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병 뚜껑을 열면 탄소 거품이 물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정한 물의 양 속에 탄소를 집어넣어도 물의 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즈음의 과학에서는 분자를 나누어서 미립자, 소립자까지도 분리합니다. 어떤 물질이든지 아무리 작게 나누어도 또 나눌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텅 빈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과 정신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저마다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안목대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자만과 아집으로 가득찬 인생은 시시각각으로 문제를 일으킵니다.

"조견오온개공"의 안목으로 볼 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생겨날 때 삶은 더욱 발전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꿈꾼다면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작은 나에 집착하지 말고 큰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럴려면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결국 공한 것으로 비춰봐야 합니다. 성공적인 인생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조견오온개공"의 결과가 "도일체고액"입니다. "도일체고액"의 뜻은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간다는 말은 결국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도"라는 말은 '건넌다'.'초우 한다'.'제도한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도"란 괴로움의 세계에서 즐거움의 세계로 건너가는 도피안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을 건진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결구 "도"의 의미는 일체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체"라는 말은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라는 말을 잘 씁니다. "일체"의 의미를 보다 선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부부싸움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은 갑자기 싸우는 부부 앞에 나아가 자기가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생전 처음 보는 알지도 못하는 스님이 잘못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스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문제 속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닙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일체"라고 하는 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액"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나서 아픈 것도 문제이며, 남편의 승진도 문제이며, 자녀의 진학도 문제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마음은 늘 괴롭고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란 우리에게 아프고 쓰라린 강물과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액"은 넘고 또 넘어야 할 거대한 산과 같으며, 건너고 또 건너야 할 엄청난 강입니다. 또 "고액'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뇌리에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는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이라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아프고 괴로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텅 비어서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괴로움이 아닌 것입니다. 즉 괴로움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이 공하다는 인식에서는 일체의 고통이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야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상처로 얼룩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캄캄한 밤길에 혼자 집으로 가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상처를 입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상처뿐인 캄캄한 밤길이 아닌 밝은 태양이 빛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존재의 실상이 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반야의 길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지혜의 눈으로 환히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도 못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반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반야는 곧 공에 대한 확실한 인식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불교의 존재 목적은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공사상은 이론적인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육신과 정신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온"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은 그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온"의 존재 양상이 바로 "개공"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텅 빈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텅 빈 모양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지헤이며, 그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없는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있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데서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텅 빈 것으로 보면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지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매달려 잘못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존재의 실상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늘은 텅 빈 것처럼 보이지만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하늘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마음도 꽉 차 있는 것으로모만 볼 것이 아니라 텅 빈 것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은 인연의 끈에 의해 잠시 있을 뿐입니다. 인연에 의해 잠시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한 공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이나 기쁨, 미움이나 성냄 등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감정들도 인연에 의해 잠시 일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의 실체는 텅 비어서 없는 것입니다. 한 순간 감정을 만나면 영원히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현자로 장자(莊子)가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 속에 "유인(遊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뜻은 '칼을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매우 잘 쓴다'는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엣날에 소를 아주 잘 잡는 백정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를 잘 잡기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날 왕에게가지 그 소문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은 어떻게 하여 그가 소를 잘 잡는지를 보려고 푸줏간으로 갔습니다. 그 백정은 소를 잡아 살을 뜨고 뼈를 가르는데 마치 곡조에 맞추어 춤추 듯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예술로 승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왕은 감탄한 나머지 그에게 칼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여 소 한 마리를 그렇게 잘 가르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백정이 되었을 때는 소가 한 덩어리로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 한 마리가 살과 뼈로 완전히 분해되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 완전히 분해된 상태에서 텅 빈 공간과 공간 사이를 지나면서 칼질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완전한 음악의 동작에 맞추어 텅 빈 공간을 딸 춤추 듯 칼질한다고 해서 "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인"의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 한 마리의 진짜 모습은 무수히 많은 공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즉, 존재의 실상은 꽉 차 있어서 아무 빈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무수히 많은 것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뼈와 살을 완전히 분해하여 텅 빈 공간까지를 보는 것입니다. 텅 빈 것을 분해하기는 아주 쉬운 일입니다. 계속되는 훈련을 통해 도의 경지에 도달한 백정은 소 한 마리를 볼 때 처음부터 텅 빈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날 하나 상하지 않고 쇠고기를 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인생 자체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체의 것이 있다고 하는 데서 괴로운 것입니다. 자의식(自意識)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한다, 미워한다, 나는 있다, 이것은 내것이다 등등의 소유의식은 그 연장선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하루 아침에 이런 일체의 감정을 다 지워버리기는 어렵겠지만 존재의 실상이 본래 텅 빈 공의 상태임을 확인하고 실천에 옮길 때 언젠가는 지혜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태양보다 밝은 광명으로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어 더 이상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봄이 되면 잎이 무성하게 피는 듯 보이지만 곧 가을이 되면 하나 둘 잎이 지듯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어떤 가르침보다 공의 가르침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최상의 약이 됩니다.

이상에서 볼 때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은 바로 불교의 목적이며, 우리 인생의 길잡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진수를 깨닫는 것이며, 불교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 나머지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반야심경>의 주된 안목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육신과 정신 세계를 텅 빈 것으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



(퍼온 글)


출처 :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글쓴이 : 수묵화좋아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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